시를 그리듯 아름다운 꿈을 만드는 명품캘린더 국내 최고 생산기업 ‘연미술’
(주)연미술 전후연 대표이사
국내 최대 옵셋 판화 기술 보유 기업으로 미술과 인쇄를 접목시켜 유명명화를 명품캘린더로 제작하여 문화상품전문개발기업으로 알려진 (주)연미술(www.yon-art.com 전후연 대표이사)이 인쇄산업과 문화컨텐츠 사업을 동시에 이끌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30년간 옵셋 판화의 외길을 걸어온 연미술은 화랑 체인화를 최초로 국내에 도입을 하였고
판화지 사용은 천만장 이상 작품을 찍었고 그양은 미국전체가 쓰는 판화지 보다 많았다. 미술작품의 시대적 변화의 흐름을 문화컨텐츠로 재해석하여 세계최초로 옵셋 인쇄 기술을 이용한 판화작품 캘린더나 다양한 판화작품을 만들어 현대미술을 대중화 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 등 현대미술작가와 정선, 장승업, 민화 판화작업, 불화 복원사업 등 한국적 문화정체성을 찾는 일과 이슬람 문화재단 코란원본복제 사업, 루브르박물관 화집 등 세계적 문화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인쇄를 문화적 가치창출의 수단으로 접목, 승화시켰다.
미술작품을 캘린더로 만든다는 의미는 원작의 색감과 느낌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전후연 대표는 연미술의 CEO이전에 판화미술의 계승과 발전에 이바지한 거장으로 판화를 상업화 하는데 성공하였고 미술문화의 진보를 통하여 산업과 문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리딩 컴퍼니의 성공리더이다.

시를 그리는 아이, 판화 미술의 거장 ‘전후연’
전후연 대표는 대학시절 전국 대학미술대전에서 캘린더라는 소재를 갖고 은상을 받게 되면서 캘린더라는 상업적 매개체를 미술적 감성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하였다. 독일문화원에선 연 1회 예술가들에게 지원해주는 지원금으로 초대전을 열 수 있는데 전 대표는 순수미술 유화, 수채화, 판화를 통한 독일문화원 초대전을 열정도로 미술적 감성이 띄어났다.
1973년 해태제과 디자인팀에서 쌓은 경력을 토대로 1976년부터 프랑스 아르슈 판화용지를 국내에 최초로 수입해서 옵셋 판화를 통한 명품 캘린더를 탄생시켰다.
미술원화의 느낌을 그대로 표현한 명품 캘린더는 기존 인쇄 4도의 색을 뛰어넘는 20도에서 60도까지 디테일한 색으로 국내 외에서 호평을 받았다.
전후연 대표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인쇄로 나오는 마지막까지 모든 공정에 참여한다. 하지만 공정을 거치다보면 처음에 원했던 방향으로 가지 않는 경우가 있어 작업장에는 인쇄시설, 촬영, 제판 등 그래픽 분야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제작공장의 20여 대의 인쇄 장비들은 전대표의 손과 발이며 미술도구이다.
“디자인이란 세계는 늘 목적과 조건이 따른다. 그만큼 여러 면에서 충실해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목적은 사랑을 위해서 이고 나의 그림은 사랑 그것을 위해서 이다.”
1975년 제1회 개인전이 끝난 직후 장욱진 화백을 만나러 명륜동 화실을 찾아갔고 제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정신적 영향을 받았다기보다 평소에 가장 아끼고 싶었던 세계를 그대로 갖고 있는 대가 옆에서 보좌하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약100여점의 판화작품을 제작하게 되었고 그 후 멘토이자 작가로서 영향을 미친 서귀포 대표 한국화가 이왈종 화백의 영향을 받아 판화미술의 감성을 극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사랑, 꿈, 젊음’을 주제로 한 제2회 개인전을 판화로 선보이며 그래픽 디자인의 세계에서 순수미술의 세계로 옮겨가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전 대표는 “대중적 인기를 얻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 ‘그림은 그림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밤을 지새우고 열정을 불태웠다. 새로움의 세계는 무한의 세계이며 그곳엔 어떠한 장벽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전후연 대표는 88년 서울 올림픽 기념포스터 일이 끝남과 동시에 벽제로 거취를 옮기게 된다. 정신없이 보내던 서울생활 보다 그림만 그리며 살고 싶은 작은 소망으로 이 같은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어떤 해는 1년에 100여점 가까운 스케치를 했고 개중에 유화나 과슈, 파스텔, 판화, 등을 작업했으며 2년여에 걸쳐 돌집을 지어 장욱진 화백과 전 대표의 그림을 전시, 보관하기 위해 미술관을 만들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느낌이었지만 그 동안 같이 고생했던 연화랑 식구들과의 인연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고 다시 연화랑에 복귀해 장흥에 작업장을 만들고 지금껏 함께하게 되었다.
“연화랑에 다시 복귀한 후부터는 나에 대한 호칭도 사장님에서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선생이란 호칭은 길을 잃지 말고 제대로 가라는 방향타 같은 말로 받아들이고 사명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디자인세계나 순수미술의 세계나 그 넓이와 한계는 같다.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 끝은 바라보는 사람의 차이이고 사실은 무한을 향해 같이 서 있는 것 이다. 차이가 있다면 스스로 한계를 어디에 두는냐에 따라 달라질 뿐 이며 나에게 묻는다면 그것은 무한이다. 라고 말 할 수 있다.
전후연 대표는 “꿈이 사랑이고 사랑이 하나의 작품이다.” 며 “내가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은 한없이 많고 그 일을 하는데 내 생이 다할 때까지 다 쓰고 가겠다.” 고 밝히며 더 나아가 “나 혼자만의 그림이기도 하지만 모두의 그림이 될 수 있다.” 라는 말을 전했다.
내년 12월에 있는 ‘전후연 3회 작품전’을 통해 대중미술의 옵셋 판화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