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필자의 칼럼을 보고 평소 친하게 지내는 후배가 일본이 독도를 탐내는 이유로 어업권과 해양지도 그리고 약 100조원 상당의 가스 하이드레이트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게다가 독도에다 레이더 기지를 설치할 경우에는 러시아, 북한, 남한을 모두 감시할 수 있어서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 후배는 평소 독도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을 뿐만 아니라 해양문제에도 조예가 깊어서 필자에게는 적지 않은 도움을 주는 친구다.
그러나 독도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독도를 노리는 일본의 속내는 복잡하게 읽혀진다.
먼저 조선시대에 있어 독도를 생각해 보자.
일본은 독도의 존재 자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다가 동해안에서 조난당하거나 표류하다가 일본 열도에 상륙하게 된 사람들을 통해 독도를 알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독도를 알게 된 후에 울릉도까지 진출하게 된 일본인들은 울릉도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목재와 수산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미 밝혔지만 1618년 에도 막부로부터 죽도(당시에는 울릉도) 도해면허를 오오야와 무라가와 양가(兩家)는 죽도도해의 지속을 위해 오오사카의 유력자 집안에 백합초, 마늘, 대죽(大竹)과 그밖의 죽도(울릉도)산 진품을 보낸 기록이 있다. 또한 이들 양가가 소속된 돗토리 번에서는 울릉도에서 채취한 전복을 ‘죽도꼬치전복’이라 하여 장군가(家) 및 막부 요직자들에게 헌상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의 일본은 독도에 대하여 품질 좋은 재목과 수산물을 얻을 수 있는 섬 정도로 인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1905년 시마네현 고시로 독도를 영토편입 조치했던 시기에 독도를 생각해 보자.
1868년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제국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하면서 주변지역의 영토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첫 번째 시도로 나타난 것이 1894년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이 현재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센카쿠열도(중국에선 조어도)’를 1895년 1월 영토편입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05년 1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센카쿠열도 편입과 동일한 방식으로 독도를 편입하였다.
시마네현 고시 형식을 빌려 취한 조치의 시작은 시마네현의 어부였던 나가이 요사브로(中井養三郞)의 독도 대하원 제출로 비롯되었는데, 나가이 역시 대하원 제출 당시에는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미 조선의 외교권까지 장악한 일본의 내각은 1905년 1월 28일 편입을 결정하였다. 나가이는 독도에서 잡히는 독도강치에 대한 수익에 집착하였지만 1904년 당시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이권을 두고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동해상에서의 러시아와의 해전을 앞두고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게 되었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8일 시작되었고, 7월 22일 독도 망루 공사에 착공한 뒤 8월 19일 준공하였으며, 9월 29일에는 나가이(中井)가 독도 대하원을 제출하였다. 망루를 설치한 일본은 10월 16일 전쟁을 끝냈는데, 전쟁이 끝나자 독도 망루의 필요성이 없어진 관계로 종전 4일 만인 19일 독도 망루 철거가 결정되었다.
이 시기에 있어 일본은 독도를 군사적 목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음으로 2차대전 종전 후 한일국교정상화까지의 시기에 독도를 생각해 본다.
2차대전의 추축국이었던 일본이 연합국의 점령하에 들어가면서 초기에는 심각한 위기 의식을 가졌었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의 공산화와 더불어 소련과 냉전체제가 구축되면서 공산주의와 맞서려는 차원에서 한반도와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와 역할이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일본에 대한 연합국의 점령정책은 온건하게 변화되고 그 틈바구니 속에서 일본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미국과의 유대관계를 공고하게 하면서 전후처리를 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도 느슨하게 체결하도록 하였다.
특히 독도문제와 관련하여 1953년 11월 17일 영국의 승소로 끝난 망끼에와 에크레호 섬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은 일본이 독도에 더욱 집착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테면 지리적으로 프랑스에 근접해 있는 망끼에와 에크레호 섬 관련 소송에서 프랑스가 수로측량, 조명 및 부표 설치, 수상의 시찰 등에 의한 실효적 지배를 주장함에 대하여 동 섬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각종 행정조치를 취한 영국의 손을 들어준 이 판결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 것이었다.
이러한 국제적 상황은 1950년대 독도문제와 관련하여 한일간 외교문서 공방에서 일본이 자신있게 나서게 했고, 급기야는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를 하자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일본은 외교적으로도 독도문제에는 자신이 있다는 점이 이 시기에 두드러졌다.
다음으로는 가스 하이드레이트 부분을 생각해 본다.
가스 하이드레이트가 처음 발견된 것은 1810년 영국의 험프리 데이비(Humphrey Davy, 1778~1829)에 의해서 였다.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스 하이드레이트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계속되고 있는데, 학계에 머물던 가스 하이드레이트가 산업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34년 《Industrial and Engineering Chemistry》에 발표된 해머슈미트(Hammerschmidt)의 논문에 의해서다. 이 논문에서 그는 천연가스의 주성분인 메탄, 에탄, 프로판 등이 물 분자와 반응하여 얼음과 유사한 가스 하이드레이트를 형성하고, 이로 인해 파이프라인의 막힘(plugging)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는 이론을 제시했고, 가스 하이드레이트의 생성 및 해리 조건, 이를 막기 위한 저해제(inhibitor)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발견은 학계는 물론 천연가스 산업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파이프라인 내의 하이드레이트 생성을 피하기 위한 천연가스 정제 공정과 저해제 적용 공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이 시기가 가스 하이드레이트 연구의 첫 번째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파이프라인에서의 가스 하이드레이트 생성 억제를 위한 연구는 해양공학 기술(Offshore Technology)의 핵심 사안 중 하나로 가스전과 유전을 개발하고자 하는 기업들의 최대 해결 과제로서 지금까지도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가스 하이드레이트 연구의 두 번째 전환점은 1965년 러시아의 한 과학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는 시베리아 영구동토층(Permafrost) 지역에 방대한 양의 천연가스가 하이드레이트 형태로 부존되어 있음을 발표했으며, 그가 참여한 시베리아 메소야하(Messoyakha) 가스전 개발 사업에서는 하이드레이트로부터 해리된 천연가스를 1969년부터 약 10년간 5.7×1,013세제곱미터 정도 생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러시아에서는 가스 하이드레이트의 탐사 관련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고, 흑해와 카스피 해, 바이칼 호에서의 가스 하이드레이트의 부존을 확인했다.
이에 반해 서방 세계는 1972년에 이르러서야 기존의 화석 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에너지 자원으로 가스 하이드레이트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당시 알래스카 지역에서 가스전을 개발해오던 한 회사가 가스 하이드레이트 코어 샘플을 채취했으며, 같은 해 캐나다의 한 석유 회사는 매켄지 델타(Mackenzie Delta) 지역의 시추 과정에서 가스 하이드레이트를 발견했다. 이러한 일련의 발견은 러시아와 미국, 캐나다로 하여금 자국 내 영구동토층에서 활발한 가스 하이드레이트 탐사 활동을 벌이는 계기가 되었다.한편 심해저 가스 하이드레이트는 1980년에서야 그 존재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당시 진행되고 있던 미국의 심해 굴착 계획(Deep Sea Drilling Project) 도중 대서양 및 태평양 해저에서 가스 하이드레이트를 발견했으며,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심해저에 가스 하이드레이트가 존재하고 있음이 1980년부터 주장되었다. 이후 계속된 탐사를 통해 세계 각국의 심해저 퇴적층에 가스 하이드레이트의 존재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그중 미국과 일본, 중국, 인도, 그리고 한국 등 5개국이 자국 내 심해저에서 가스 하이드레이트 샘플 시추에 성공했다. 지금까지 가스 하이드레이트의 확인을 위한 탐사와 시추가 연구의 중심에 있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지만, 향후 가스 하이드레이트로부터 천연가스를 생산하기 위한 개발 기술의 연구도 많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가스 하이드레이트에 대해서는 2007년 11월 독도 인근의 동해에서 발견된 대규모의 가스 하이드레이트 퇴적층으로 인해 차세대 에너지 자원으로서 주로 부각되고 있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세기부터 시작된 긴 연구 역사와 여러 산업적인 응용 분야는 국내에 아직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다양한 분야에서의 가스 하이드레이트 응용 기술 연구를 소개하고, 이를 통해 에너지 자원 및 가스 산업에서의 중요성을 살펴봄으로서, 국내 가스 하이드레이트 연구가 더욱 활발해지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차세대 천연가스 공급원으로서의 자원 잠재성과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탄소 절감 방법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자원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볼 때 일본이 가스 하이드레이트 때문에 독도를 노린다는 부분은 크게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어업자원과 관련한 독도를 생각해 보자.
원양어업이 본격화되기 전의 동해안에서는 독도 근처의 대화퇴어장(大和堆漁場)이 어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대화퇴어장은 울릉지역 인근의 다른 깊은 바다와는 달리 수심이 얕은 바다에 퇴적물이 쌓여, 영양염류가 풍부하여 각종 수산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동해안의 평균수심이 1,400m 정도로 깊지만 대화퇴어장은 평균 수심이 300~500m 정도의 수심이 얕은 바다이다. 면적은 106만㎢ 정도이며, 남하하는 리만(Rieman) 한류와 북상하는 쿠로시오(Kuroshio) 난류가 만나는 곳이다. 대화퇴어장에서는 난류와 한류가 뒤섞이거나 수층을 이루면서 공존하게 되어 심층수와 표층수의 물리·화학적 변화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특히 영양염류는 표층으로 용출되어 식물 플랑크톤이 대량 증식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어류의 먹이가 되는 동물 플랑크톤의 증식도 같이 확산되어 수산자원이 풍부한 수역이 되는 것이다. 오징어, 꽁치, 방어, 연어, 송어, 돌돔, 벵에돔, 개볼락, 전복, 소라, 해삼, 문어, 방어 등의 수산자원들이 풍부한 어장이다.
현재 대화퇴어장은 지난 1998년 11월 신 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하면서 한·일 양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공해 성격의 공동관리수역의 약 50%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곳에서는 양국 어선들이 모두 조업이 가능하다.
일본이 독도를 노리는 이유중 하나로 어업자원과 관련이 있다는 점은 대화퇴어장에서 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독도를 노리는 일본의 속내는 특정한 하나의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가지 부분을 포괄하고 있다 하겠다.
역사적 사실관계를 비추어 봐도 독도는 섬이라는 영토로서의 위치가 아니라 그의 존재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가지의 가치와 중요성이 상당한 영토이다.
일본이 20세기초 러시아와의 전쟁을 앞두고 군사적 목적으로 강탈하려 했던 독도에 대해 어업자원과 해저자원, 그리고 외교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세를 취해왔지만 지금 우리는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일본은 다음세대에 대한 교육을 통해 독도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보이고 있지만, 우리는 이러한 일본의 의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우리의 소중한 영토인 독도를 지키는 일에 더 큰 마음을 쏟아야 할 것이다.
